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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를 편찬한 거칠부(居柒夫)의 화랑 흔적 찾기 한 며칠 한파(寒波)가 북풍(北風)을 타고 내려오더니만 입춘(立春) 앞에서는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그만 남풍(南風)을 허락(許諾)하고 만다. 우리에겐 24절기(節氣)가 있다. 오랜 농경문화(農耕文化)가 만들어낸 훌륭한 유산(遺産)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기가 막히고도 정확(正確)하게 계절(季節)이 들어맞는 것을 보면 무릎이 쳐진다.
www.pjnonsul.com 우리민족(民族)은 시베리아에서 남(南)으로 따뜻한 농토(農土)를 찾아 하강(下降)하여, 오늘날 베이징 동쪽 갈석산(碣石山)에서 홍산문화(紅山文化)를 꽃피우고 조선(朝鮮)-고조선(古朝鮮)-이라는 거대제국(巨大諸國)을 형성(形成)하여 중국(中國) 한족(漢族)의 나라 한(漢)나라와 자웅(雌雄)을 겨루었다. 중국(中國)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것도 따지고 보면 동쪽의 동이족(東夷族) 연합(聯合), 서북쪽의 흉노족(匈奴族)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는 것을 이젠 모두가 아는 상식(常識)이다. 혹자(或者)는 중원(中原)에서 5호(胡) 16국(國)을 건설(建設)한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 저, 강족(羌族)을 흉노(匈奴)와 선비(鮮卑) 및 갈족은 동이족계통(東夷族系統)으로, 저족과 강족(羌族)은 오늘날 티벳 민족(民族)으로 보기도 한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에 보관 하고 있는『삼국사기』표지[국제신문 제공]
www.pjnonsul.com 이렇듯 거대(巨大) 제국(諸國)을 건설(建設)한 단군(檀君)을 신화(神話)로 보는 현행(現行) 역사교육(歷史敎育)을 보면 답답함을 넘어 걱정이 앞선다. 산동반도(山東半島) 곡부(曲阜)에서 태어난 공자(孔子)도 동이족(東夷族)을 예(禮)를 가진 민족(民族)으로 보았고, 맹자(孟子) 역시 조세제도(租稅制度)를 말하면서 동이(東夷)의 풍습(風習)이라고 했던 것은 결코 우연(偶然)이 아니다. 또한 자기(自己) 민족(民族)의 역사(歷史)를 축소지향적(縮小指向的)으로 가르치는 민족(民族)은 이 지구상(地球上)에 우리뿐이 아닌가 한다.
www.pjnonsul.com 지금 중국(中國) 요동지방(遼東地方)에서부터 한반도(韓半島) 전역(全域)까지 발굴(發掘)되는 비파형(琵琶型) 동검(銅劍)과 수많은 고인돌은 과연 누구의 역사(歷史)란 말인가. 특히 전 세계(世界) 고인돌 중 반 수 이상이 한반도(韓半島)와 중국(中國) 동북(東北)쪽에 집중적(集中的)으로 나타나는 이유(理由)를 어떻게 설명(說明)할 것인가. 답답할 따름이다.
절 이름을 잃어버린 장항리사지 오층석탑
www.pjnonsul.com 또 하나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담겨진 책이 발견(發見)되면 일단 위서(僞書)라고 단정(斷定)해 버리는 나쁜 습관(習慣)이 있다.『환단고기(桓檀古記)』나『규원사화(揆園史話)』같은 단군(檀君)에 관련(關聯)된 사서(史書)는 모조리 위서(僞書)라고 한다. 심지어『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정사(正史)로 보면서도 자신(自身)의 지식(知識)으로는 해석(解釋)이 되지 않은 부분(部分)이 나타나면 오자(誤字)나 탈자(脫字)라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있다. 그것도 한국(韓國) 사학계(史學界)의 대부(大父)로 알려진 사람들이 말이다. 한번쯤은 자신(自身)을 되돌아보고 자신(自身)의 연구(硏究) 성과(成果)에 혹시 잘못은 없었는지 성찰(省察)이 필요(必要)한 때가 아닌가 한다.
www.pjnonsul.com 일찍이 역사(歷史)의 중요성(重要性)을 인식(認識)하여 서책(書冊)으로 편찬(編纂)한 이가 있다. 그가 거칠부(居柒夫)-황종(荒宗)-이다. 비록 진흥대제(眞興大帝)의 명(命)으로 그때까지의 신라(新羅) 정통사(正統史)인『국사(國史)』를 편찬(編纂)하였다고는 하나, 거칠부(居柒夫) 역시 올바른 사관(史觀)을 가졌기에 가능(可能)하지 않았을까 한다.
www.pjnonsul.com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 거칠부전(居柒夫傳)을 보면 거칠부(居柒夫)의 성(姓)은 김씨(金氏)요,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 377~402)의 5대손인데, 조부(祖父)는 잉숙(仍宿)-『화랑세기(花郞世紀)』엔 내숙(乃宿)으로 기록됨- 각간(角干)이요 아버지는 물력(勿力) 이찬(伊湌)이다. 거칠부(居柒夫)는 소시(少時)에 사소(些少)한 일에 거리끼지 않고 원대(遠大)한 뜻을 품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사방(四方)으로 다니며 구경하였다라고 기록(記錄)되어있다.
www.pjnonsul.com 신라(新羅) 황실(皇室)의 자손(子孫)으로 중이 되는 것은 하등(何等)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사방(四方)으로 다니며 구경하는 것은 화랑(花郞)들의 풍습(風習)인 유오산수(遊娛山水)에 해당(該當)하는 것이다. 비록 거칠부(居柒夫)가 화랑(花郞)이었다는 기록(記錄)은 어떤 곳에도 나타나지 않지만 화랑(花郞)이었을 개연성(蓋然性)은 곳곳에서 발견(發見)할 수 있다.
진평왕릉 옆 숭복사지 삼층석탑
www.pjnonsul.com 다시『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으로 가보자.
www.pjnonsul.com 거칠부(居柒夫)는 진흥대제(眞興大帝) 6년 을축(乙丑 : 554년)에 왕명(王命)을 받아 여러 문사(文士)들을 모아『국사(國史)』를 찬수(撰修)하고 파진찬(波珍湌) 벼슬을 더하였다. 동왕(同王) 12년 신미(辛未 : 560년)에 왕(王)이 거칠부(居柒夫)와 구진(仇辰) 대각찬(大角湌), 비태(比台) 각찬(角湌), 탐지 잡찬(迊湌), 비서(非西) 잡찬(迊湌), 노부(奴夫) 파진찬(波珍湌), 서방부(西方夫) 파진찬(波珍湌), 비차부(比次夫) 대아찬(大阿湌), 미진부(未珍夫) 아찬(阿湌) 등 8 장군(將軍)을 명(命)하여 백제(百濟)와 더불어 고구려(高句麗)를 침공(侵攻)하였는데, 백제인(百濟人)은 먼저 남평양(南平壤)을 격파(擊破)하고 거칠부(居柒夫) 등은 승승(乘勝)하여 죽령(竹嶺) 이북(以北), 고현(高峴) 이내의 10군(郡)을 취(取)하였다.
www.pjnonsul.com 여기에 나타나는 인명(人名) 중(中) 화랑(花郞)들의 전기(傳記)로 알려진『화랑세기(花郞世紀)』에 기록(記錄)된 사람을 보면,
www.pjnonsul.com 거칠부(居柒夫)파진찬(波珍湌)은 2세 풍월주(風月主) 미진부공(未珍夫公)-아찬(阿湌)-의 누이와 결혼(結婚)하여 딸 윤궁(允宮)을 낳았다. 신라(新羅) 섹스스캔들의 주인공(主人公) 미실(美室)이가 미진부공(未珍夫公)의 딸이니 윤궁(允宮)과 미실(美室)은 종형제간(從兄弟間)이 된다. 또한 미진부공(未珍夫公)의 아내가 원화사건(源花事件)으로 준정(俊貞)에게 죽은 남모(南毛)이다. 윤궁(允宮)은 8세 풍월주(風月主) 문노(文弩)의 아내이다. 윤궁(允宮)은 문노(文弩)와 결혼(結婚)하기 전(前) 진흥대제(眞興大帝)의 아들 동륜태자(銅輪太子)를 섬겨 윤실공주(尹實公主)를 낳았다.
www.pjnonsul.com 비대(比臺)각찬(角湌)은 법흥대왕(法興大王)과 옥진궁주(玉珍宮主)-1세 풍월주(風月主) 위화랑(魏花郞)의 딸- 사이에 태어났다. 법흥대왕(法興大王)이 비대공(比臺公)을 태자(太子)로 세우려 하였으나 지소태후(只召太后)-23대 법흥왕(法興王)의 딸이자 24대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 지소(只召)는 법흥왕(法興王)의 동생 즉 삼촌(三寸)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과 결혼(結婚)하여 진흥왕(眞興王)을 낳았다-의 반대(反對)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www.pjnonsul.com 노부(弩里夫파진찬(波珍湌)은 25대 진지대왕(眞智大王) 원년(元年) 8월에 거칠부(居柒夫)를 대신해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진지왕(眞智王)이 색(色)을 밝혀 방탕(放蕩)하자, 어머니 사도태후(思道太后)-진흥왕비(眞興王妃)-가 미실(美室)과 진지왕(眞智王)의 폐위(廢位)를 의논(議論)하여 친 오빠 노리부(弩里夫)로 하여금 그 일을 행(行)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조에 나오는 <황조가>
www.pjnonsul.com 구진(仇辰)대각찬(大角湌)은 22세 풍월주(風月主) 양도공(良圖公)의 아버지이다. 구진(仇辰)은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 지소태후(只召太后)의 침신(枕臣)-베갯머리 신하(臣下)-으로 있다가 태후(太后)와 정(情)을 통(通)하여 양도공(良圖公)을 낳은 것이 된다.
www.pjnonsul.com 비차부(比次夫)대아찬(大阿湌)은 23세 풍월주(風月主) 군관공(軍官公)의 증조부(曾祖父) 오종(五宗)에게 딸 비란(比蘭)을 시집보내어 오란(五蘭)을 낳고, 거칠부(居柒夫)의 아들 동종(冬宗)을 데려다 오란(五蘭)을 배필(配匹)로 삼게 하여 군관공(軍官公)의 아버지 동란공(冬蘭公)을 낳았다. 동란공(冬蘭公)은 음성서(音聲署)의 장(長)으로 향가(鄕歌)를 잘 하였다고 한다.
www.pjnonsul.com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 거칠부전(居柒夫傳)에 나오는 인명(人名)과『화랑세기(花郞世紀)』에 기록(記錄)된 사람을 비교(比較)해 보면 대다수(大多數)가 화랑(花郞)들과 직접적(直接的)인 관계(關係)가 있는 것으로 파악(把握)된다. 이것은『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저자(著者) 김부식(金富軾)이 무슨 연유(緣由)인지는 몰라도 이들이 화랑(花郞)이었다는 것을 교묘(巧妙)히 피해서 적고 있는 것이 된다. 왜 무슨 이유(理由)에서 김부식(金富軾)은 화랑(花郞) 중(中)의 화랑(花郞) 풍월주(風月主)를 지낸 사람조차도 단 한 줄의 행간(行間)도 할애(割愛)하지 않았을까? 의문(疑問)이 아닐 수 없다.
www.pjnonsul.com 『국사(國史)』를 편찬(編纂)할 정도(程度)의 학식(學識)과 덕망(德望)을 갖춘 사람인 거칠부(居柒夫)가 당대(當代) 신라사회(新羅社會)의 청소년(靑少年) 수련기관(修鍊機關)이면서 꼭 거쳐야 할 등용문(登龍門)인 화랑(花郞)에 들지 않았다면 이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특히 화랑(花郞)들이 본격적(本格的)으로 역사(歷史)의 전면(全面)에 등장(等張)하는 24대 진흥왕(眞興王) 시절(時節)에 파진찬(波珍湌)의 지위(地位)에 오르고, 진흥왕(眞興王)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오르는 진지왕대(眞智王代)에 신하(臣下)로써는 최고위직(最高位職)인 상대등(上大等) 자리에까지 올랐던 거칠부(居柒夫)가 화랑(花郞)무리에 가담(加擔)하지 않았다면 과연(果然) 중신(重臣)이 될 수 있었을까? 보문리 석조. 물이 빠질 수 있게 석조에 구멍이 나있다.
www.pjnonsul.com 지금 중국(中國)은 서남공정(西南工程)을 거의 마무리하고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모든 국력(國力)을 동원(動員)하고 있다. 만약(萬若) 거칠부(居柒夫)의『국사(國史)』가 남아 있다면 상황(狀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 자명(自明)하다. 그러나 혹『국사(國史)』가 발견(發見)된다고 해도 현재(現在)까지 우리가 배운 지식(知識)과 다르다면 위서(僞書)라고 할 것이 분명(分明)하니 더욱더 작금(昨今)의 세태(世態)가 야속할 따름이다.
www.pjnonsul.com 또한 우리는 단일민족(單一民族)의 환상(幻想)에 사로잡혀 중국(中國) 25사-중국(中國)정부(政府)가 정사(正史)로 인정(認定)하는 역사(歷史)서(書)-의 하나인 금사(金史)에 분명(分明) 자신(自身)들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왕족(王族) 김씨(金氏)라고 적혀져 있는 사실까지도 부정(否定)하고 있는 현실(現實)이다. 몽고족(蒙古族)과 돌궐족(突厥族)-터키-은 우리 민족(民族)과의 연관성(聯關性)을 말하면서 그 외(外) 말갈(靺鞨),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 거란(契丹), 여진(女眞), 만주족(滿洲族)과는 아무런 연관성(聯關性)이 없다는 주장(主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만 년 전에는 비행기(飛行機)도 없었을 것이고, 무슨 수로 요동(遼東) 및 한반도(韓半島)로 들어왔을까?
www.pjnonsul.com 혹시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건국신화(建國神話)를 액면(額面)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닐지 실소(失笑)를 금(禁)할 수 없다. 그러나 희망(希望)은 있다. 지금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하고 있는 미래(未來)의 화랑(花郞)들에게는 기성세대(旣成世代)와는 또 다른 역사의식(歷史意識)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날을 고대(苦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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