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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에 묻노라. 中 녹음방초성화시(綠陰芳草盛花時)란 말이 참으로 다가온다. 어디에 눈을 두어도 매양(每樣) 녹음(綠陰)뿐이요, 어디서 눈을 감아도 푸름뿐이다. 마음도 몸도 아니 꿈도 모두 푸르다. 이렇게 푸름이 활개를 치는 이즈음이 되면 벌써 탁족(濯足)이 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입하(立夏)가 어저께였고, 곧 소만(小滿)과 망종(亡種) 다가오고 있다. 예로부터 소만(小滿)은 모내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알토란 같이 자란 모를 넓은 무논으로 던지던 모습은 이젠 오래된 흑백(黑白) 영사기(映寫機)에서나 볼 수 있는 역사(歷史)가 되어버렸다. 세상(世上)은 이처럼 빠르게 변화(變化)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변(變)한다 하더라도 영원(永遠)히 변(變)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역사(歷史)이다. 어제의 삶은 이미 역사(歷史)의 일부분(一部分)이 되어버렸고, 오늘도 시시각각(時時刻刻) 역사화(歷史化) 되어 가고 있다. 역사(歷史)는 우리들의 삶의 거울이자, 표본(標本)인 것이다. 그래서 역사(歷史)는 진실(眞實)을 담고 있는 생명체(生命體)에 비유(比喩)되곤 한다.
벗꽃이 탄성을 자아낼 듯 함박꽃으로 피어 있다.
www.pjnonsul.com 김부식(金富軾) 역시 대단한 문필가(文筆家)이면서 역사학자(歷史學者)이다. 그가『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編纂)할 당시(當時)에도 역사서(歷史書)는 있었다.『구삼국사(舊三國史)』등 여러 가지 역사서(歷史書)가 세상(世上)에 존재(存在)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식(富軾)은 당대(當代)에 전(傳)해져 오던 역사서(歷史書)가‘글이 거치고 졸렬하고 사적의 유루가 많아(文字蕪拙 事迹闕亡)’다시 편찬(編纂)한다고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에 밝히고 있다. 이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에 재미있는 내용(內容)이 들어 있어서 소개(紹介)한다.
www.pjnonsul.com 오늘날 논문(論文)이 완성(完成)되면 책(冊)으로 엮어 스승이나 지인(知人)들에게 드린다. 이때 드리면서 하는 말이‘컵라면 뚜껑으로는 쓸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은 김부식(金富軾)이『삼국사기(三國史記)』를 완성(完成)하여 왕(王)에게 올리면서 고(告)하는 말씀 속에 들어 있다. 적어보면,‘바라오니 성상폐하(聖上陛下)께옵서 이 소루(疏漏)한 편찬(編纂)을 양해(諒解)하여 주시고, 망작(妄作)의 죄(罪)를 용서(容恕)하여 주소서. 이것이 비록 명산(名山)에 비장(秘藏)할 거리는 되지 못하나 간장병 뚜껑과 같은 무용(無用)의 것으로는 돌려보내지 말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는 부분(部分)이다. 김부식은 최대한(最大限) 몸을 낮추어 겸손(謙遜)의 말로 왕(王)께 아뢰었지만, 오늘날은 무용(無用)의 것을 유용(有用)으로 아예 바꾸어 자신(自身)을 낮추는 것이다.
www.pjnonsul.com 그럼‘글이 거치고 졸렬(蕪拙)하고’란 어떤 것을 말할까? 정말로 김부식(金富軾) 같은 고려(高麗) 대(大) 문장가(文章家)가 보기에, 전(傳)해오던 사책(史冊)이 그가 말한 것처럼 글 자체(自體)가 거치고 졸렬(拙劣)하였을까? 그러나 오늘날에는 비교(比較)를 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김부식(金富軾)의『삼국사기(三國史記)』는 국보(國寶)로 엄중(嚴重) 보관(保管)되고 있지만, 김부식(金富軾)이 고기(古記)라고 통칭(統稱)한 사책(史冊)은 단 한권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김부식(金富軾)이 편찬(編纂)한『삼국사기(三國史記)』나 일연의『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그 편린(片鱗)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지리산 대원사에 감추어진 탑
www.pjnonsul.com 김부식(金富軾)은 방언(方言)을 이야기하면서는 항상(恒常) 김대문(金大問)이 지은『화랑세기(花郞世紀)』를 인용(引用)하고 있다.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의 차차웅(次次雄)은 무(巫)-무당-를 뜻한다고 한 것과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의 이사금(尼師今) 역시 방언(方言)으로 잇금을 뜻한다고 한 것,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의 마립간(痲立干)이 말뚝을 뜻하는 것 역시 김대문(金大問)의 말을 인용(引用)하고 있다. 이처럼 많이 인용(引用)한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저서(著書) 이름은『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 설총전 말미(末尾)에‘김대문(金大問)은 본래(本來) 신라(新羅) 귀문(貴文)의 자제(子弟)로, 성덕왕(聖德王) 3년(704)에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이 되었고 전기(傳記) 약간 권을 지었으며, 그의『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記)』,『악본(樂本)』,『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그 서책명(書冊名)만 간신히 기록(記錄)하고 있다. 만약 이때 김부식(金富軾)이 이 서책(書冊) 중(中) 어느 것이라도『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記錄)하였다면, 많은 부분(部分)의 역사(歷史)가 오늘날 뒤바뀌었을지 모른다. 왜 기록(記錄)하지 않았을까? 대문장가(大文章家)인 김부식(金富軾)이 질투(嫉妬)를 해서일까?
www.pjnonsul.com 사실 야사(野史)이긴 하지만, 김부식(金富軾)은 자신(自身)보다 시(詩)를 잘 짓는 정지상(鄭知尙 : ?~1135)을 매우 싫어하였다고 한다. 결국 정지상(鄭知尙)을 서경파(西京派)로 몰아서 묘청(妙淸 : ?~1135)의 난(亂) 때 죽였다는 이야기가 여러 야사집(野史集)에 남아 있을 정도(程度)이다. 야사(野史)는 어디까지나 흥미본위(興味本位)의 각색(脚色)이 필수적(必須的)으로 가해졌다는 것을 감안(勘案)하면 믿을 바가 못 된다. 그러나 김부식(金富軾)이 정지상(鄭知尙)보다 시(詩) 부분(部分)만은 부족(不足)하였다고 하는 데에는 동의(同意)를 하는 사람이 많다. 어쨌든 김부식(金富軾)은『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編纂)하면서 수집(收集)한 당대(當代)까지 남아 있던 사책(史冊)을 모두『고기(古記)』라고 지칭(指稱)하면서 거의 무시를 한 것으로 판단(判斷)된다. 그나마 김대문(金大問)의 저서(著書)들은 이름이나마 남아 있으니 매우 다행(多幸)이 아닐 수 없다, 효불효교 전경. 이 설화에서 김부식이 감추고자 했던 당시 서라벌 풍속이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다.
www.pjnonsul.com 오늘날『화랑세기(花郞世紀)』를 일본(日本)에서 필사(筆寫)하였다는 서책(書冊)이 발견(發見)되어 역사학계(歷史學界)는 물론 온 학계(學界)가 소금 만난 미꾸라지다. 진서(眞書)든 위서(僞書)든 일단 연구(硏究)를 해보아야 할 가치(價値)는 충분(充分)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완고(頑固)한 유교(儒敎) 집안에서 태어나 한학자(漢學者) 및 강역연구자(疆域硏究者)이며 또한 교육자(敎育者)로 살다 간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 : 1889~1962)가 무엇 때문에 화랑(花郞)들의 난삽(難澁)한 전기(傳記)인『화랑세기(花郞世紀)』를 창작(創作)하였을까? 김부식(金富軾) 당대(當代)에까지 남아 있었고, 또한 인용(引用)까지 한 서책(書冊)을『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編纂)할 때 기록(記錄)하였다면 오늘날 같은 진(眞) ․ 위서(僞書) 논쟁(論爭)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직도 나는 묻고 싶다. 왜『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編纂)하면서 당대(當代)의 가치관(價値觀)과 상이(相異)하다는 이유(理由)로 그 많은 서책(書冊)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는지 정말로 묻고 싶다. 특히 주옥(珠玉)같은 천년(千年)의 노래 향가(鄕歌)를 단 한 수라도 기록(記錄)하였다면 김부식(金富軾)을 대하는 태도(態度)가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화랑도(花郞徒)의 용맹(勇猛)과 그들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높이 평가(評價)하면서, 왜 그렇게『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제대로 대접(待接)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김부식(金富軾)에게 아니 남아 있는『삼국사기(三國史記)』에게 묻고 싶다. 혹시 난삽(難澁)한 화랑(花郞)들의 이야기가 걸림돌이 되었지 않았을까? 그럼『화랑세기(花郞世紀)』의 어떤 기록(記錄)이 김부식(金富軾)을 손사래 치게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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