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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대사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삼천리(三千里) 금수강산(錦繡江山) 골골이 축제(祝祭)에 들떠있다. 마음도 하늘 높이 나르고, 떨어진 꽃잎 역시 저만치 공중(空中)을 향해 나래를 편다. 이 꽃이 피면, 저 꽃이 준비(準備)를 하는 등, 연(連)이어 팡파르를 울려 새아씨 분홍빛 마음만 전율(戰慄)을 느끼게 하던 봄날이 이젠 주섬주섬 옷깃을 여미며 갈 길을 재촉한다. 올핸, 하고 기다리던 옆구리는 역시, 하고 사정없이 매몰차게 사라져 버린다.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으로 가는 마의태자도 노서동 고분군을 가로질러 갔을 것이다.
www.pjnonsul.com 향가(鄕歌)의 발자취를 찾아다닌 지가 벌써 한 해가 가려고 한다. 골마다 숨어있는 향가(鄕歌)의 깊은 속내의 향내 맡기를 기대감(期待感)에 부풀어 항상(恒常) 발길이 저만치서 나를 기다리곤 하였다. 오늘은 그 발길을 멈추고, 향가(鄕歌)의 노래 속으로 침잠(沈潛)해 본다.
www.pjnonsul.com 신라(新羅)는 56대 경순왕(敬順王 : 927~935)이 나라를 들어(?) 고려(高麗)에 바치면서 천년(千年)의 역사(歷史)가 그만 종말(終末)을 고(告)하게 되었다. 슬픈 마의태자(麻衣太子)는 개골산(皆骨山)-금강산(金剛山)이 모두 다 바위로 되어 있어 이렇게도 불렀다-으로 들어가 망국(亡國)의 한(恨)을 포효(咆哮)하며, 오지 못할 영원(永遠)한 사바세계(裟婆世界)로 떠난 지가 오래이다. 천년(千年) 황도(皇都) 서라벌(徐羅伐)에 울려 퍼졌던 향가(鄕歌)도 망국(亡國)과 함께 서서히 저녁노을 가장자리로 들어갔다. 다시는 누구라도 불러주지 않을 착잡함을 간직한 채로 말이다.
균여대사가 못생겼다고는 하나 마음만은 이 아름다운 꽃과 같았으리라.
www.pjnonsul.com 고려(高麗)는 4대 황제 광종(光宗 : 949∼975) 대(代)가 되면 개국(開國)의 혼란(混亂)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하던 때였다. 영민(英敏)한 광종(光宗)은 처음에는 호족세력(豪族勢力)과의 마찰(摩擦)을 최대한(最大限) 피하면서 후일(後日)을 기약(期約)하였다. 안으로는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으로 대별(大別)되는 불교종파(佛敎宗派)를 아우르려는 사상(思想) 통일작업(統一作業)에 분주(奔走)하였다. 이때 발탁(拔擢)된 고승(高僧)이 균여대사(均如大師 : 923-신라 경명왕 7년에 태어남~973)이다. 균여대사(均如大師)는 그 생김새가 너무나 못생겨서 부모(父母)로부터 버림받았고, 심지어는 송(宋)나라 사신(使臣)이 만나기를 청(請)해도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는 그 외모(外貌)를 문제 삼아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www.pjnonsul.com 그러나 고려(高麗) 최고(最高) 개혁군주(改革君主) 광종(光宗)을 만나면서부터 물 만난 고기마냥 흐트러진 민심(民心)을 불심(佛心)을 이용(利用)하여 하나로 모이게 하였다. 특히 광종(光宗)과 균여대사(均如大師)는 하층민(下層民)을 사랑하는 부분(部分)에서는 그 뜻이 정확(正確)하게 들어맞았다고 한다.
겁외사 성철스님 동상.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www.pjnonsul.com 일단 나라가 안정(安定)을 되찾자, 광종(光宗)은 그동안 준비(準備)하였던 개혁(改革)의 칼날을 들이대기 시작하였다. 먼저 개국(開國) 초(初)부터 호족(豪族)들의 나라라고 까지 하였던 지방(地方) 호족(豪族)들의 권세(權勢)를 제압(制壓)하기 위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施行)한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이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하는 과정(過程)에서 불가피(不可避)하게 노비(奴婢)가 된 사람들을 선별(選別)하여 양인(良人)으로 풀어주는 법(法)이였다. 그러나 노비(奴婢)가 곧 경제력(經濟力)의 바탕이던 호족(豪族)들에겐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법(法)이었다. 호족(豪族)들은 힘을 합해 광종(光宗)에게 대항(對抗)해 보지만, 즉위(卽位) 후(後) 7년간이나 벼르고 벼른 끝에 나온 정책(政策)이기에 광종(光宗)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www.pjnonsul.com 더구나 광종(光宗)은 후주(後周)의 귀화(歸化)인 쌍기(雙冀)의 건의(建議)란 형태(形態)를 빌어 과거제(科擧制) 시행(施行)을 공표(公表)하였다. 그동안 고려귀족(高麗貴族)들은 개국공신(開國功臣) 집안이면 아무런 문무(文武)의 재주 없이 모든 국가권력(國家權力)을 독차지하여 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으로 한풀 꺾인 고려(高麗) 호족(豪族)들은 다시 과거제(科擧制)라는 철퇴(鐵槌)를 맞자, 삼삼오오(三三五五) 살 길을 찾아 사분오열(四分五裂)하기 시작(始作)하였다.
www.pjnonsul.com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후삼국(後三國) 통일과정(統一過程)에서 지방(地方) 호족(豪族)들의 세력(勢力)을 규합(糾合)하기 위해 29명의 부인(夫人)을 맞이하였다. 이렇게 탄생(誕生)한 고려(高麗)의 호족(豪族)들은 자손대대(子孫代代)로 영화(榮華)를 누리기 위해 갖은 수단(手段)과 방법(方法)을 동원(動員)하여 민초(民草)들의 삶을 도륙(屠戮) 내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하층(下層) 백성(百姓)을 위한 군주(君主)의 사랑 앞에 그 누구도 다른 명분(名分)으로 말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겁외사 내부
www.pjnonsul.com 이런 사회(社會)의 혼란(混亂)을 수습(收拾)하는 곳에 균여대사(均如大師)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균여(均如)는 향가(鄕歌)를 ‘세인희락지구(世人戱樂之具)’-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도구-라고 하면서 향가(鄕歌)를 이용(利用)하여 민심(民心)을 수습(收拾)하려고 하였다. 이때 균여(均如)가 부른 노래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이다. 총 11수의 향찰(鄕札)로 기록(記錄)된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혁련정(赫連挺)이 지은『균여전(均如傳)』에 실려 오늘에 전(傳)하고 있다. 특이(特異)한 것은 최행귀(崔行歸)가 이 향가(鄕歌)를 한문(漢文)으로 번역(飜譯)-역가현덕분(譯歌現德分)-하였다는 것이다. 최행귀(崔行歸)는 번역(飜譯)을 하면서 ‘삼구육명(三句六名)’이란 향가(鄕歌)의 형식(型式)을 지칭(指稱)하는 듯, 말을 덧 붙여 놓았다. 아직까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연구자(硏究者)들도 명확(明確)히 모른다.
www.pjnonsul.com 균여(均如)가 백성(百姓)들을 불심(佛心)으로 돌아오게 하였던 향가(鄕歌)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중(中) 총결(總結)하는 <총결가(總結歌)>를 현대어(現代語)로 불러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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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계 다하면 | | 生界盡尸等隱 |
내 원(願)도 다할 날도 있으니 | | 吾衣願盡尸日置仁伊而也 |
중생을 깨움이 | | 衆生叱邊衣于音毛 |
끝 모를 해원(海願)이고 | | 際毛冬留願海伊過 |
이러이 가면 | | 此如趣可伊羅行根 |
가는 대로 선(善)길이여 | | 向乎仁所留善陵道也 |
이와 보현행원(普賢行願)이며 | | 伊波普賢行願 |
또 부처의 일이더라 | | 又都佛體叱事伊置耶 |
아으 보현의 마음을 알아 | | 阿耶 普賢叱心音阿于波 |
이밖의 타사사(他事捨)하고자 | | 伊留叱餘音良他事捨齊 |
www.pjnonsul.com 균여대사(均如大師)가 지은 향가(鄕歌)는 가장 이른 시기 향찰(鄕札)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문학적(文學的) 큰 의의(意義)가 있다.『균여전(均如傳)』이 1075년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완성(完成)되었고, 향가(鄕歌) 14수가 수록(收錄)된『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인 1281년에 편찬(編纂)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 200년의 시차(時差)를 두고 기록(記錄)된 향찰(鄕札)을 두고, 먼저 수록(收錄)된『균여전(均如傳)』이 신라시대(新羅時代) 향찰(鄕札)의 모습에 가장 근접(近接)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認定)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밀양의 영남루. 중생을 향가로써 구제한 균여대사도 이런 곳에서 쉬어 갔을 것이다.
www.pjnonsul.com 비가 자주 내리고 있다. 푸른 마음엔 더없이 좋은 자양분(滋養分)이 될 것이다. 그동안 밟았던 향가(鄕歌)의 발자취가 이제 한 곳에 모아져서 세상(世上) 밖으로 여행(旅行)을 할 것 같다. 도움과 격려(激勵)를 아끼지 않았던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표(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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